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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여 하나님이 너를 통해 하실 위대한 일에 꿈을 꿔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청년들 중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분명한 비전과 꿈을 붙잡고 살아가는 청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고 싶은 공부와 가지고 싶은 직업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청년들은 구체적인 비전은 없지만 삶의 계획은 많다. 예를 들어 집을 사고 싶고, 의사가 되고 싶고, 엔지니어가 되고 싶고, 선생님이 되고 싶다. 크리스천 청년들은 세상 청년들보다 더 깊은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 소수 청년들 중에는 “나는 크게 성공하고 싶다, 이름을 알리고 싶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청년들은 이러한 꿈을 꾸기도 쉽지 않다. 열심히 일은 하지만,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하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질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청년들은 꿈을 잃어버리거나, 하나님을 위한 비전과 자신의 삶을 따로 떼어놓는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왜 청년들은 더 이상 꿈꾸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시대의 패턴이다. 과거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어릴 적부터 민족과 나라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물론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청년들에게는 민족과 공동체를 향한 큰 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은 풍요 속에 살고 있음에도 오히려 더 깊은 불안에 시달린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주거 환경은 나아졌지만, 우울증과 고립, 미래에 대한 불안은 커져만 간다. 이것은 분명 시대적 문제이지만, 말씀 안에서 원인을 바로 보고 나아간다면 변화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청년은 원래 꿈꾸는 세대라는 사실이다. 역사를 보라. 세상의 큰 변화와 혁명은 언제나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3·1 운동, 한국의 민주화 운동, 심지어 공산혁명까지도 중심에는 청년들이 있었다. 청년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그 꿈을 행동으로 옮겨 역사를 바꾸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청년이 꿈꾸기 힘든 구조가 되어버렸다. 풍요 속에서도 방향을 잃고, 세상의 압박과 불안이 청년들의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가장 큰 문제다.

하나님의 꿈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 하셨지만, 인간이 범죄함으로 세상은 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씨를 통해 모든 민족을 복 주시겠다고 하셨고, 그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비전을 보여준다. 모든 민족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 셀 수 없는 무리가 어린양 앞에 나아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창조하신 모습으로 세상의 온전히 회복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면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바로 우리의 비전이다.

그렇다면 청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대로 완성되도록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룰까?”가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이 먼저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맞추려 하기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 속에 내 삶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묻는 것이 시작이다. 바로 거기서 청년의 꿈과 하나님의 비전이 만난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꿈꾸는 자를 찾으신다. 성경은 “청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면 흉악한 자를 이긴다”(요일 2장)라고 말한다. 청년은 원래 강하다. 그러나 그 힘의 원천은 육체적 젊음이 아니라 말씀 안에 거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 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세상의 압박과 사탄의 거짓을 능히 이길 수 있다. 오늘날 청년들이 꿈꾸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풍요는 있지만 방향은 없고, 기회는 많아 보이지만 참된 의미는 잃어버린 이 시대가 청년들의 비전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말씀 안에 뿌리내린 청년은 시대의 압박을 이겨내고 다시 꿈꿀 수 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라는 결단은 두렵고도 큰 도전이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돈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섬길 수 없다. 세상이 청년의 꿈을 빼앗을지라도,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이기게 되고, 그 믿음을 통해 주님은 실제로 역사하신다.

우리가 가장 먼저 바꿔야 하는 것은 순서다. 많은 청년들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먼저 정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비전을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기 욕망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 속 아브라함을 보라.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소원은 자식을 얻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아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꿈과 미래,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셨다.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원과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에 두었다. 결국 그는 이삭을 하나님께 내려놓았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시며 “네가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단순히 아들을 바치려는 결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꿈과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다’라는 믿음의 선언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우연히 이끄시는 분이 아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과 배경을 가지고 제국 전역을 누비며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의 배경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내려놓으라 하실 때는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꿈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교다. 선교란 단순히 먼 나라로 떠나는 장기 사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음이 없는 곳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확장이며, 이미 세워진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도 선교다. 모든 사람이 해외 선교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리에서 선교에 동참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만 섬기며 하나님의 비전을 제한하지 말라. 하나님은 교회의 틀 안에만 갇히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비즈니스, 교육, 의료, 정치, 예술, 과학, 그 어떤 영역 속에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 어떤 이는 비즈니스로 얻은 영향력과 재정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어떤 이는 교육 현장에서 다음 세대를 세우며, 어떤 이는 의료의 자리에서 생명을 살리고 복음을 나누며, 어떤 이는 정치 속에서 정의를 세우고 약자를 보호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특히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직장에서 경험을 쌓은 청년들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큰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한 경험과 전문적인 배경은 단순한 경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대에 맞게 사용하시기 위해 주신 도구이며,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자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청년들은 내가 있는 자리와 경험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할 수 있을지를 묻고, 그 자리에서 선교사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직업도 사용하실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목사, 선교사, 예배팀에서만 역사하신다”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영역에서 일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된다. 하나님은 혼자서도 이루실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시작은 단순하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무엇을 할까요?”라는 기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기도를 드리다 보면 내가 하나님을 제한했던 마음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비전이 있었지만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 때문에 외면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다시 우리를 부르신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사에 대해 나누겠다. 1800년대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었고, 당시 서양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들이 낯선 땅, 조선에 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그들을 움직였고, 그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가난한 자들을 돌봤다. 그러나 그 대가로 많은 이들이 질병과 사고로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훗날 조선과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었고, 정치·경제·교육·의료의 각 영역에서 크리스천 지도자로 나라를 변화시켰다. 수적으로 많지 않았지만, 그 소수의 청년들이 한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청년들이여, 이 시대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비전 앞에 위대한 꿈을 구하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그 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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